보내야 하는 사람, 남아야 하는 사람
개천절, 추석, 한글날.
올해는 유난히 긴 연휴가 이어진다.
보통이라면 들뜬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세어야겠지만,
올해는 다르다.
회사도, 팀도, 나도 그렇다.
며칠 전 AHM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자발적 퇴사”, “재택근무 축소”, “무제한 휴가 폐지”.
공식적인 설명은 “조직의 효율화”와 “지속 가능한 구조”.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 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이미 대상자는 추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약 2주 전.
아침에 대표의 메시지가 슬랙에 올라왔고,
거의 동시에 권고사직 대상자들에게 메일이 발송됐다.
그날 이후 회사의 공기는 확실히 달라졌다.
팀 채널은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드디어 시작됐구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팀의 대상자
우리 팀에도 한 명의 대상자가 있었다.
팀 규모가 크지 않아서,
누가 빠져도 바로 공백이 느껴지는 구조였다.
그래서 이 결정은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전체적인 방향은 정해져 있었고,
예외는 없었다.
결국 그 한 명을 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 몫이었다.
선택의 순간
인력 감축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내보낼지.
회사와 경영진은 이유를 숫자로 설명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결국 사람이 있다.
나는 판단해야 했다.
팀의 밸런스, 업무 연속성, 기술적 기여도.
이 모든 걸 고려해도 답은 명확했다.
결국 나는 그를 선택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차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엔지니어로서의 이해도나 주도성도 부족했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종종 새로운 문제를 남겼다.
일을 맡기면 다시 손봐야 했고,
결과물은 늘 불안정했다.
팀의 안정성을 생각했을 때,
누군가를 내보내야 한다면 그가 맞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을 적었다.
쉬운 판단, 무거운 책임
그 선택이 어렵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리더에게 필요한 건 냉정함이다.
하지만 냉정하다는 건,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결정이다.”
그 말을 스스로에게 여러 번 되뇌었다.
하지만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그 이후의 공기
그날 이후 팀의 공기는 달라졌다.
회의 중에도, 대화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농담이 줄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권고사직은 떠나는 사람만의 일이 아니다.
남은 사람들에게도 깊은 흔적을 남긴다.
명절 인사
그런 와중에 추석이 다가왔다.
개천절부터 한글날까지 이어지는 긴 연휴.
보통이라면 “잘 쉬세요” 한마디면 충분했을 텐데,
이번엔 그 말조차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더 어색했다.
여러 번 고치고 다듬은 끝에,
결국 이렇게 썼다.
짧은 메시지였지만,
그 안에 담긴 말 하나하나가 쉽게 써지지 않았다.
‘좋지 않은 소식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
그 문장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했다.
대답하지 않은 사람
메시지를 보낸 뒤,
팀원들은 차례로 반응을 남겼다.
“행복한 한가위 보내세요..”
“연휴 잘 보내세요.”
등등..
그리고 단 한 사람,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ㄷ.
그가 바로 이번 권고사직 대상자였다.
그의 침묵은 길었다.
나는 메시지 창을 여러 번 열었다 닫았다.
“괜찮냐”는 말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 말이 그에게 위로가 아닌,
또 다른 상처로 들릴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업의 냉기
요즘 IT 산업 전반이 무겁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개발자는 언제든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요즘은 시장이 좋지 않아”는 말이 더 현실적이다.
AI와 자동화, 효율이라는 단어가
사람의 자리를 빠르게 줄여가고 있다.
기업은 비용을 계산하고,
투자는 멈췄고,
시장은 조용하다.
전반적으로 시장이 많이 변했다.
리더의 외로움
리더의 자리는 언제나 고립되어 있다.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회의실 안에서는 냉정해야 하고,
팀원 앞에서는 단단해야 한다.
퇴근한 그의 책상을 보면 마음 한켠이 비어 있다.
나는 그에게 실망도 했고,
미안함도 느꼈다.
그 두 감정이 섞여,
하루를 마무리할 때마다 묘한 후회가 남았다.
리더의 책임은 무겁다.
냉정해야 하지만,
냉정한 척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안다.
행복과 현실의 간극
나는 늘 말한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건 진심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회사는 효율을 말하고,
조직은 성과를 요구한다.
행복은 늘 그 뒤로 밀린다.
그래도 나는 사람을 믿는다.
좋은 팀은 어려운 시기에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좋은 리더는 자신이 왜 냉정해져야 하는지를
잊지 않는다.
그게 내가 붙잡고 있는
마지막 신념이다.
연휴의 의미
연휴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고향으로 향하고,
가족을 만나러 떠났다.
나는 아직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여러가지 이슈를 정리하다보니
어느새 사무실엔 나만 남아 있었다.
업무를 정리하고 퇴근하며 그의 책상에 잠시 머물렀다.
그의 의자 한쪽에 손을 올리며
들리지 않겠지만 말을 건넸다.
"연휴 잘보내세요."
그리고 사무실 불을 끄며 나는 퇴근 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냥 인사가 건네고 싶었다.
연휴가 끝나면
연휴가 지나면 회사는 다시 돌아간다.
연휴가 끝나도, 그는 여전히 회사에 남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맡길 일이 없다.
그가 할 일도, 내가 줄 일도 없다.
회사에서 공식적인 퇴사 일정이 정해질 때까지,
우리는 어색한 시간을 함께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쓰인다.
할 말이 있어도, 그 말이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서로가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건 서로에게 상처만 남는 시간이다.
회사는 절차를 밟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도, 나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만
그 이해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언젠가 이 시간이 지나가겠지.
그가 떠나고, 나는 다시 팀을 정리하겠지.
하지만 그때 남는 건 안도감이 아니라,
안타까움일 것이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이 시기도 결국 지나갈 것이다.
그는 회사를 떠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팀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지만,
이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리더로서 냉정해야 했던 순간,
그 냉정함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긴 미묘한 거리감.
결국 남는 건 일보다 사람이고,
성과보다 기억이다.
나는 지금 이 일을 잘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견디고 있는 걸까.
그 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런 시간들을 겪어야만
리더라는 자리가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는 것.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바란다.
누군가의 결정으로 누군가가 상처받지 않는 세상.
최소한, 그 상처가 헛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