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정리

시간은 우리 각자 다르게 흐른다

kani 2025. 9. 7. 22:49

고등학교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장

며칠 전,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자리는 즐겁게 모이는 동창 모임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참으로 친했던 친구의 아버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사실 퇴근길 지하철에 막 몸을 실은 참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머릿속엔 오늘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로 가득했다. 집에 가서 씻고, 간단히 뭔가를 먹고, 조금은 쉬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오랜만에 보는 이름. 그래도 늘 가끔 안부를 주고받던 몇 안 되는 친구였다.

 

“○○ 아버님 돌아가셨어.”

 

지하철 안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막 퇴근 지하철을 탄 순간이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차를 몰아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마음이 급해 차는 빨라지고, 운전하는 동안에도 온갖 생각이 스쳐갔다.

 

장례식장의 공기

밤공기는 서늘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특유의 묘한 공기가 느껴졌다. 조용하지만 무겁고, 슬픔이 스며든 공기. 몇 발자국 걸어 들어가자마자, 고등학교 시절 함께했던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5명이 모여 있었다.

10년 만에 만난 얼굴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얼굴은 조금 변했지만, 목소리 톤이나 웃는 모습, 농담하는 방식은 그대로였다. 그 순간, 고등학교 시절의 교실, 운동장, 그리고 밤늦게까지 이야기 나누던 장면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친구들의 추억 속에 없는 나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가지 깨닫게 된 게 있었다. 그들이 꺼내는 추억 속에서 나는 종종 빠져 있었다.

“야, 우리 에버랜드 갔던거  기억나?”
“맞아, 그때 진짜 웃겼지. ○○가 거기서…”

그들이 웃으며 떠올리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자꾸만 조연이 되거나, 아예 없었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각자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나름의 길을 찾아 나서느라, 그들의 추억에 자주 함께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나도 분명히 그들과 함께 뛰어놀던 친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시간은 나를 두고 따로 흘러가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없는 그들의 추억이 쌓이는 동안, 나는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길, 다른 시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우리는 같은 출발선에서 함께 뛰기 시작했지만, 곧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누구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 근처에서 직장을 잡고 부모님 곁을 지켰다. 누구는 살던 곳을 떠나 먼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나 역시 다른 선택을 했다. 그 결과, 같은 또래로 함께 자랐지만 지금은 서로 다른 속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내 이름이 빠져 있어도, 그게 그저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은 이미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었으니까. 한때는 매일 붙어 다니던 사이였지만, 성인이 된 순간부터 우리는 다른 시간 속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어색하지만 따뜻했던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만에 친구들을 만난 시간은 따뜻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야, 넌 왜 아직도 똑같냐?” 같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다들 직장인 티가 나는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어른으로써의 무게가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각자의 삶은 변했지만, 그 안에 있는 그들의 본모습은 여전히 익숙했다.

특히 조문을 마치고 친구 어머님께 인사를 드렸을 때, 마음이 무거웠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가족을 떠나보내는 그 슬픔 앞에서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저 “힘내”라는 말만 겨우 할 수 있었다. 그 말이 오히려 공허하게 들리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늦은 밤이라 도로가 한산했다. 오디오에서는 예전 노래가 흘러나왔고, 창밖으로는 네온사인과 달빛이 번갈아 스쳐갔다. 그 속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이 20년 동안 뭘 했지?’
‘내가 잘 살아온 게 맞나?’

분명히 나는 나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일찍 사회에 나와 버티고,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고, 나만의 삶을 만들려고 애써왔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도 많다. 하지만 동시에 놓친 것도 많다. 특히, 오늘 장례식장에서 느낀 것처럼, 친구들과의 수많은 순간들.

사람은 다 각자의 속도로 산다. 어떤 이는 가정을 꾸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어떤 이는 고향을 지키며 익숙한 풍경 속에 산다. 나는 또 다른 길에서 나만의 시간을 쌓아왔다. 누구의 길이 옳다, 누구의 길이 그르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방향이 다를 뿐.

 

시간이 흐른다는 것

그날 운전대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20년 동안을 회상해 봤다. 그러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른다. 그러나 그 시간은 각자의 삶 속에서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어떤 사람에게는 빠르게, 어떤 사람에게는 더디게. 누군가는 추억을 쌓아가고, 누군가는 일에 몰두하며,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리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후회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이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얻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은 것도 있는 법,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장례식장을 나설 때, 우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음에 보자”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다음에 다시 만날 때도 오늘처럼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 같은 날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더 오랜 세월 동안 서로의 안부조차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즐겁게 모일 수도, 혹은 또 다른 이별의 자리일 수도 있다. 인생은 우리가 계획하지 않아도 흘러가고,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 다른 속도로 성장한다. 중요한 건 그 속도보다, 다시 만났을 때 반갑게 웃으며 “잘 지냈냐” 하고 묻는 그 순간이 아닐까.

 

남은 건

이번 경험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다. 삶의 속도는 제각각이고, 우리는 늘 무언가를 얻는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잃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다시 이어지는 인연이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본 밤하늘처럼, 우리 인생도 각자 다른 별빛으로 흘러가지만, 결국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연결되어 있다.

나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싶다.
나와 함께했던 시간, 그리고 앞으로 다시 만나 웃을 수 있는 순간들.
그 모든 것이 삶을 조금 더 단단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