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를 쓰다, 지웠다.
여행기를 쓰다, 지우다
나는 한동안 여행기를 연재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단순히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누군가와 여행의 순간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사실 여행 자체가 주는 즐거움만큼이나, 돌아와서 기록을 정리하는 과정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그건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몇 편 쓰다가 전부 지워버렸다.
왜 그렇게 됐을까?
바쁜 일상 속에서
솔직히 말하면, 가장 큰 이유는 바빴기 때문이다. 회사 일로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고 씻고, 조금이라도 정리하려 앉으면 어느새 시계는 자정을 훌쩍 넘어가곤 했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글을 붙잡고 있어도, 머릿속은 멍하고 문장은 자꾸만 꼬였다.
여행기를 쓴다는 건 단순히 글자를 적는 일이 아니었다. 사진을 꺼내 정리하고, 날짜를 맞추고, 그때의 감정을 떠올려 문장으로 붙잡아야 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낮에 이미 다 써버린 에너지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글쓰기가 어려운 사람
게다가 나는 원래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글을 쓰려 하면 이상하게도 장황해지고, 서론이 길어져 본론은 흐지부지, 결론은 늘 맥없이 끝난다. 나 혼자 읽어도 재미가 없으니, 남들이 읽으면 더 재미없을 것 같았다.
여행의 재미는 순간순간에 있는데, 나는 그 순간을 제대로 붙잡지 못했다. 오히려 사소한 디테일에 매달리다가 큰 흐름을 놓쳐버리곤 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먹은 커피가 왜 썼는지”를 길게 늘어놓다가, 정작 그날의 하이라이트였던 풍경은 몇 줄로 퉁쳐버리는 식이었다. 그러니 글이 산만해지고, 쓸수록 자신감은 줄어들었다.
연재의 압박
‘연재’라는 단어도 나를 압박했다. 한 번 올리면 그다음, 또 그다음을 써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는데, 점점 “오늘은 꼭 써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바뀌었다. 재미로 해야 할 일이 숙제가 되자, 더 이상 손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끝까지 써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여행기를 완주해야 한다는 압박. 하지만 나는 끝맺음을 잘 못하는 성격이다. 시작은 화려하지만, 마무리는 늘 어색하다.
성격 이야기
사실 이건 글쓰기뿐 아니라 내 삶 전반에 해당된다. 책을 사두고 끝까지 다 읽은 적이 드물고, 운동도 며칠은 열심히 하다가 흐지부지된다. 작은 프로젝트도 시작은 요란하지만, 마지막은 조용히 사라지곤 한다.
여행기도 그랬다. 마음만 앞서서 시작했지만, 끝까지 이어갈 힘이 없었다. 그러니 도중에 멈추는 게 당연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싹 다 지우는 것.
지워버린 글 뒤에 남은 것
글은 사라졌지만, 여행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오히려 글로 옮기지 못한 덕분에, 더 자유롭게 떠오른다. 갑자기 길을 잃었던 골목길, 우연히 들어간 작은 식당에서 마신 맥주 맛, 기차 창밖으로 흘러가던 풍경… 이런 장면들은 글보다 더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
글로 쓰면 기록은 되지만, 동시에 정해진 틀에 갇힌다. 반면 머릿속 기억은 계속 움직이고, 때마다 다르게 빛난다. 어쩌면 글로 옮기지 않았기에 더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글과 기억의 차이
나는 이 차이를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다. 글은 무겁다. 책임을 요구한다. 한 번 써내려가기 시작하면, 앞뒤 맥락을 맞추고, 문장을 다듬고, 완결성을 갖추어야 한다. 반면 기억은 자유롭다. 오늘은 웃으면서 떠올리고, 내일은 쓸쓸하게 회상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글보다 기억이 편했다. 글은 나를 옭아맸고, 기억은 나를 놓아줬다.
스스로에 대한 성찰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가 전혀 의미 없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이번 경험을 통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나는 완벽하게 끝맺는 걸 어려워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나쁜 건 아닐지도 모른다. 덕분에 늘 새로운 걸 시작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걸 경험할 수 있으니까.
다시 쓰고 싶다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쓰고 싶다. 다만 이번엔 연재 같은 건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냥 그날그날 떠오르는 대로, 짧게라도 남기면 된다. ‘끝까지 써야 한다’는 부담 없이, 오늘의 기분을 남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면 오래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에필로그
여행기를 쓰다 지운 경험은, 어찌 보면 실패 같지만 내겐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글을 못 써도 괜찮다. 중간에 멈춰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순간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여행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살아 있고, 언젠가 다시 꺼내 글로 쓸 수도 있다. 그때는 더 자유롭게, 더 편하게. 그리고 설령 또 중간에 멈추더라도, 이번엔 지우지 않고 남겨두고 싶다. 그것조차 나의 기록이니까.